짧은 생각/일본과 한국, 일본과 세계

일본에는 남탕에 들어가는 여자가 있다

RoughTough 2025. 4. 3. 01:17

일본 와서 처음으로 동네 목욕탕에 갔을 때였다. 오랫만에 때를 밀려고 예약을 하고 들어갔는데, 세신사가 나이 서른 정도 되어 보이는 여성분이었다. 남탕에 여자라니? 화들짝 놀라서 허겁지겁 손에 든 수건으로 앞을 가렸다. 그런데 놀란 건 나뿐이었다. 다른 일본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알몸으로 덜렁덜렁 들어와서 베드 위에 눕더라. 내가 당황해서 허둥지둥하는 꼴을 본 세신사가 씩 웃더니 외국인이냐고 물었다. 한국에서는 남탕에서 때 밀어주는 사람은 남자였어서 깜짝 놀랐다고 했더니, 일본은 보통 남탕이든 여탕이든 여자가 때를 민다고 했었다. 지금이야 좀 익숙해져서 그렇게 놀라지는 않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흠칫하곤 한다.

 

회사를 다니면서도 비슷한 경험을 자주 했다. 한국 같으면 짐을 나를 때 "여직원이니까 좀 가벼운 거", "남직원이니까 좀 무거운 거" 이런 식으로, 누가 지시를 하지 않더라도 어련히 알아서 나눠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그런 게 없었다. 직원이면 남녀를 떠나 자기 짐은 자기가 들어야 한다. 여직원이라고 봐주지도, 남직원이라고 특별히 더 시키지도 않는다. 남녀에 따라 일을 나누는 게 아니라, 그냥 "네 일이니까 네가 들어라" 하는 식이다.

 

일본 여자는 짐도 척척 잘 나른다.
출처 : ChatGPT

 

비슷한 풍경은 슈퍼나 쇼핑센터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여자친구나 아내가 쇼핑한 물건을 남자들이 들어주는 것이 상식이다. 어련히 알아서 안 들어주면 욕먹거나 삐지거나 싸우거나 셋 중 하나일 것이다. 애 책가방을 무겁다고 부모가 대신 들어주는 것도 보통이다. 근데 일본 사람들은 각자 자기 물건 자기가 들고 다니는 게 당연하고, 아이의 책가방이 아무리 무거워도(특히 일본은 초등학생들이 큼지막한 란도셀을 메고 다니는데) 엄마가 대신 들어주는 법이 없다. 궁금해서 주변의 일본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그게 할 일이니까" 라는 투의 대답이 돌아왔다.

 

집 안에서도 역할 중심의 사고는 그대로 나타난다. 맞벌이 부부인데도 아내가 주로 아이를 돌보고 집안일을 하는 것을 자주 본다. 당사자한테 안 힘드냐고 물어보면 "그야 당연히 힘들지만 엄마란 원래 그런 거 아냐?" 라고들 한다.

 

즉, 일본 사람들에게는 개인의 특성이나 상황보다는 주어진 역할이 훨씬 중요하다는 뜻이다. 역할은 해당 개인의 책임이며, 내 역할을 남에게 떠넘기거나 부탁하는 것은 민폐라는 사고방식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언뜻 보면 극한의 집단주의처럼 느껴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지극히 개인주의적이기도 하다. 내게 주어진 역할만 잘 하면 되고, 다른 사람이 죽을 쑤던 메주를 빚던 상관을 않기 때문이다. 그저 한 발짝 떨어져서 관찰할 뿐. 남의 역할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기본이기에, 한국 사람 눈에는 굉장히 서로에게 무관심한 사회로 비친다.

 

그렇다 보니, 오지랖 빼면 시체인 한국인 입장에서는 일본 사람들과 같이 일하다보면 종종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 일이 전체적으로 산으로 가고 있는데도 "나는 내 역할 다 했으니까" 라며 별 신경 안 쓰는 일본인 동료들을 보면 안타까움을 넘어 복장이 터질 때가 왕왕 있다.

 

그리고 이런 역할 중심의 사고방식은 일본인들이 뭔가 문제가 생겼을 때 문제의 원인과 해결보다는 희생양을 먼저 찾게 만드는 원인이기도 하다. 일본 사회에서는 뭔가 문제가 발생하면 누구 탓인지를 먼저 찾는다. 일본 말로는 범인 찾기犯人探し라고 한다. 내가 내 역할을 다 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역할을 다 하지 못 한 누군가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평소 행실이 그래서 중요하고, 암묵적인 룰을 통해 평소에도 서로를 평가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몇 년 전 올해의 단어가 "각자도생"이었던 적이 있었다. 내 앞가림 하기도 벅찬 세상에서 남이사 뭘 하건 알 바냐는 사람도 많아졌다. 예전처럼 다른 사람 일에 남 같지 않다며 오지랖을 부리면 꼰대 소리를 듣는 세상이 됐다. 이런 모습들을 보다 보면, 우리 사회도 점점 지금의 일본 사회처럼 되는 걸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