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유튜브 알고리즘 따라 생각 없이 영상을 보다가 이런 영상이 걸렸다.
"한국 남자들이 생각하는 스시녀의 이미지를 들은 일본인의 충격적인 반응"
흔히 인터넷에서 떠도는 '스시녀'에 대한 이미지를 일본인에게 소개해주고 그 반응을 보는 영상이었다. 한국 커뮤니티나 SNS에서 "스시녀는 이래서 좋다"며 유포되는 특징들을 일본인 여성에게 읽어주고, 그에 대한 반응을 듣는 형식이었는데, 일본인 여성의 반응이 "당연한 거 아냐?"로 일관되고 있었다.
'제목이 어그로가 과한한데' 싶다가도 "대 황 본"이니 "저게 한국에서는 언제부턴가 당연하지 않게 되었지" 하는 댓글창을 보니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졌다.
스시녀 판타지에 등장하는 ‘기본 예절들’
영상에 등장하는 '스시녀'의 특징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 결혼할 때 돈을 합쳐서 경제사정에 맞게 시작함.
- 데이트 비용을 더치페이 하거나, 적어도 다음 차례엔 본인이 낼 생각을 함
- 고맙다는 말을 자주 하고, 미안하다는 말도 잘 함
- 남편이 집안일 하고 애 봐주면 고마워함
- 남자 부모님 앞에서도 예의를 갖추고 인사 잘 함
- 싸움이 생겨도 소리 지르거나 감정적으로 폭발하지 않고 조용히 이야기하려 함
이외에도 “존댓말을 꾸준히 쓴다”, “감정 기복이 적다”, “남의 입장을 먼저 배려한다”는 특성들도 종종 언급된다. 요는 ‘예의 바르고 조용하며, 자립적인 태도를 가진 여성’이란 이미지다.
조용하거나 쿨하다는 건 일본인들의 특성이겠지만, 그걸 제외하면 대부분 그저 인간이라면 누구나 해야 할 기본 도리에 관한 내용들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게 가능하거나 이걸 긍정하면 찬양받고 있다. 예전에 유튜브에 아내가 남편 도시락 싸주는 브이로그 영상에 악플이 엄청 달렸다는 기사를 봤을 때는 그냥 할 일 없는 관종 악플러들 짓이겠거니 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면 그게 아닌 듯 하다.
‘기본’이 ‘판타지’가 된 사회
도움을 받으면 고맙다고 하고, 잘못했으면 미안하다고 하고, 다른 사람을 만나면 밝게 웃으면서 인사하고, 자기 할 일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기가 알아서 하고.이런 당연한 행동이 스시녀에 대한 "판타지"처럼 된 인터넷을 보면서, 이게 인터넷 커뮤니티 특유의 침소봉대가 아니라면 정말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기본적인 인간관계의 예절'이라는 게 멸종했나 싶었다.
왜 남녀 관계에서 이런 기본적 예절이 '레전드다', '역시 스시녀다' 하는 찬사로 도배되어야 하나?그렇다면 역으로 한국에서는 예절을 지키는 사람은 ‘호구’가 되고, 먼저 고맙다고 혹은 미안하다고 하면 '지는' 건가?
연애에 '밀당'이니 하는 말은 20년 전부터 있었다. 누가 더 덜 주고 더 많이 얻는지를 따지며, 끌려간다느니 쥐여산다느니 했지만, 그건 그저 남의 사랑싸움 내지는 연애를 보면서 옆에서 시샘 섞인 훈수를 두는 수준에 불과했다. 그러나 요즘 인터넷 커뮤니티의 반응을 보면, '사랑'도 '연애'도 다 수익율과 승률을 따지는 것처럼 보인다. '결혼'이야 경제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하는 편이기 때문에, 결혼에 경제적 여건을 고려하는 것은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런 감정들을 죄다 숫자로 환산하기 시작하면 과연 그곳에 '존중'은 있는 건가?
그런 사회에서는 이런 보편적인 예절이 비일상적인 ‘판타지’가 될 법하다. 연인 사이에서도 사소한 감사나 미안함을 표현하는 일이 ‘을의 행동’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그 당연한 예절은 허구적 이상처럼 보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판타지를 소비하는 이들은 점점 더 현실과 도덕의 괴리를 보며 현실을 더욱 비관할테다.
예의 없는 예의지국
우리는 분명 백년 전만 해도 ‘동방예의지국’이라 자부했다. 공익방송이나 소위 요즘 말로 하면 "국뽕 방송"에서는 꼭 등장하는 단골 단어였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런 단어 못 들은지 한참 된 것 같다. 예절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어른을 공경하고 이웃과 더불어 사는 것을 미덕이라고 방송에서도 강조하던 시대가 있었는데, 요즘은 그 모든 것이 다 "적폐", "틀딱", "유교 탈레반"이 된 걸까.
그런데 그 결과가 지금 한국 인터넷에 만연한 조롱과 적개심이라면, 차라리 "유교 탈레반"이 옳은 것 아닐까.위에서 언급한 댓글에는 “어차피 저런 여자도 김치 묻으면 변한다”라든가, "김치 묻은 스시녀가 최악의 혼종"이라는 반응도 있었다. 이는 곧 그 조롱과 적개심이 자국을 향하고 있다는 뜻이리라.
그런데 이렇게 지적하면, "외국이 더 매너 없다"느니 "스시녀 음흉하고 문란하다"느니 하면서 '내려치기'부터 하려고 들겠지. 그럼에도 결국 이 문제의 본질은 한국 사회 내부의 붕괴된 예절 문화와 인간관계의 문제라는 점을 피할 수 없다.
이런 거 보면 출산율 0.78도 기적적인 거 아닐까 싶기도 하다.
'스시녀'가 아니라 '외국녀'가 맞을지도
물론 일본도 사람사는 곳인데, 이상한 사람은 어딜 가나 있는 법이다. 그리고 사회적으로도 가부장제, 성 역할 강요, 유리천장 문제 등 다양한 문제가 있다. 하지만 최소한 ‘예의’라는 면에서는, 아직도 기본선을 지키는 사회다. 길거리에서 모르는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하고, 항상 "실례합니다" "감사합니다" 를 입에 달고 살고, 애가 버르장머리 없으면 부모가 혼내고 수습하는 게 기본이다. '메이와쿠'에 '문화'를 붙인다는 걸 생각해보면 일본에서는 응당 그러겠거니 싶기도 하지만, 이게 딱히 일본만의 특성일까.
영상 주제가 일본이다보니 일본 얘기를 하게 되지만, 일본 사는 외국인들 하는 양을 보면 "스시녀 특"은 일본 여자의 특징이 아니고 인류 보편적인 매너인 듯 하다.
그걸 보고 한국 사람들이 ‘스시녀는 다르다’고 느끼는 건, 그냥 한국이 너무 무너져버렸다는 방증 아닐까.
‘스시녀’라는 말은 분명 비하하는 의미에서 쓰이기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느새 한국 인터넷에서는 찬양의 대상이 되고 있다. 원래는 일본 여성의 성적 이미지나 순종적 태도를 조롱하거나 비꼬는 말로 사용되었으나, 시간이 지나며 그 반대의 의미, 즉 한국 사회에서 결여된 ‘예의와 배려’의 상징처럼 소비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한국 여성에 대한 불만의 반사적 표현도 있을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한국의 세태에 대한 반발 심리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본질은, 우리가 한때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기본’이 이제는 더 이상 일상에서 보기 어려운 것이 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일본'이라는 (만만한) 외부 이미지에 투영시켜서 갈망하게 되었다는 것.
한 사회가 망가지는 순서는 이렇다.1단계는 예절이 조롱당하고,2단계는 신뢰가 사라지고,3단계는 사회를 구성하는 관계들이 붕괴되기 시작한다.
지금의 한국은, 거의 3단계 근처 어딘가에 있지 않나 싶다.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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