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생각/잡상

엔씨가 망하다니 정말 다행이다.

RoughTough 2025. 4. 20. 04:05

엔씨소프트가 MSCI 지수에서 퇴출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사를 봤다. 엔씨 직원이나 주주라면 무진장 기분 나빠하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무슨 엔씨한테 통수맞은 린저씨거나 해서 엔씨한테 억하심정 같은 것이 있는 것은 아니다만, (오히려 트릭스터M 출시 소식을 듣자마자 망하겠다는 직감에 들고 있던 주식 다 던져서 살아남았다.) 이전부터 엔씨의 상징과 같던 '유저 적대적 운영' 이 우리나라 게임산업계를 좀먹고 있다고 강하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엔씨소프트 사옥
엔씨소프트 사옥 (출처 : 연합뉴스)

주가 폭락, 영업 적자, 10년 만에 돌아온 '엔씨가 위험해'

엔씨가 요새 다시 신문 헤드라인에 자주 등장하기 시작했다. 어디나 그렇듯 신문에 자주 나온다는 건 별로 좋은 일이 아니다. 리니지M 문양 사건, 쓰론 앤 리버티(TL) 실패, 호연 실패 및 리니지 슈퍼계정 의혹, 그리고 24년 실적 어닝 쇼크까지. 지난 몇 년간 엔씨는 주요 이슈마다 유저의 신뢰를 잃어가며 추락의 길을 걸었다. 이쯤 되면 누가 봐도 개별 사건이 아니라, 엔씨의 근본에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발표된 24년 영업적자는 그간의 업보가 청산되는 중이라 보는 게 타당할 듯 하다. 다만 최근 엔씨를 다루는 기사에서는 '개발력 문제', '시장의 변화에 올라타지 못 한 문제', '방만한 경영'만을 지적하고 있지만, 과연 그것이 문제일까.

엔씨소프트 : 고객 적대 운영의 대표주자

원래부터 엔씨가 이미지 좋은 회사는 아니긴 했다. PC 정액제 시절부터 리니지로 여러 사건사고를 일으키기도 했지만, 그 시기에는 '아이온'이나 '블레이드 앤 소울'처럼 기술적으로 완성도 높은 게임을 출시해 한국 게이머들에게 국뽕을 선사하기도 했다. 다만 블소 백청산맥 업데이트를 시작으로 2중과금, 3중과금 식의 유저 착취형 BM을 점점 도입하기 시작했고 이는 2017년 리니지M(린M) 출시와 함께 정점을 지나 폭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리니지 시리즈가 '그들만의 리그'였기에 일반 대중에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엔씨의 고객파괴적인 상술이 대중에게 적나라하게 알려진 것이 21년 연초의 '린M 문양 롤백 사건'이었다. 

린M에 업데이트 된 문양 시스템을 게임사가 자기네 멋대로 롤백시켜버리고, 이 문양 시스템에 1억원 이상 과금한 유저가 화나서 항의하러 가자 사과는 고사하고 문전박대하고 내쫓은 일이 유튜브 영상으로 알려졌을 때, 대다수의 한국 게임 유저들은 '끄덕끄덕'했다. 이런 반응은 '가챠', '뽑기'로 대표되는 확률형 BM에 집착하며, 양산형 모바일게임만을 반복적으로 출시해온 한국 게임사들에 대한 환멸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엔씨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지, 혹은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았는지, 트릭스터M과 블레이드 앤 소울 2를 연달아 출시하며 오히려 시장에 더 큰 충격을 안겼다. 이어서 출시한 린W에서는 출시 후에 출시 전 쇼케이스에서 발표했던 '순한 맛 BM'이 다 말장난이었다는 게 드러나면서 또 다시 시장에 '고객을 이런 식으로도 농락할 수 있다'는 신선한 충격을 안겨 줬다.

엔씨가 미국 회사였다면 진즉에 시장에서 사라졌을 것

엔씨가 미국이나 다른 선진국에서 영업을 했다면 정부로부터 천문학적인 과징금을 때려맞던, 집단 소송에 패소해서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물게 되건 해서 이미 망해 없어졌을 것이다. 아니, 그 전에 소비자들에게 철저히 외면당해서 시장에서 퇴출당했을 것이다. 일례로 EA는 스타워즈 배틀프론트 II에서 랜덤박스 과금 모델을 도입했다가 전 세계 유저들의 엄청난 반발에 부딪혔고, 불과 일주일 만에 시가총액 30억 달러가 증발한 뒤 이를 철회했다. 일본의 경우 Cygames의 『그랑블루 판타지』는 특정 캐릭터 '안치라'를 뽑기 위한 가챠에서 과도한 과금 유도 논란이 터지며 소비자청에 2,000명이 집단 진정을 넣었다. 그 결과로 '9만 엔 이상 과금 시 원하는 캐릭터 보장'이라는 스파크 제도가 생기며, 일본 게임 업계 전체에 강력한 자율규제가 도입됐다.

법과 제도는 그 특성상 어느 나라건 시장의 빠른 변화를 따라가기 힘들다. 이런 상황에서 소비자의 직접적인 불매와 항의가 더욱 강력한 억제 수단이 되는 것이다.

엔씨는 기형적인 한국 게임산업이 낳은 괴물

이런 의미에서 현재의 기형적인 한국의 게임 시장은 절반쯤 유저의 책임도 있다. 확률형 아이템의 불투명성과 사행성, 운영진의 방만한 불통 운영에 대한 문제제기가 꾸준히 나왔지만, 법과 제도는 원래 그렇듯 전혀 바뀌지 않았고, 유저들마저 “어차피 다 그렇다”며 체념해왔다. 때문에 엔씨처럼 극소수의 헤비 과금 유저에게만 빨대를 꼽고 내수에만 매달리는 기형적인 산업이 됐다.

하지만 이제 한국 게이머들도 달라졌다. 유저들은 "얼마를 태웠느냐" 대신 "이 게임사를 믿을 수 있느냐"를 묻기 시작했고, 게임사나 규제 기관의 행동이 옳지 않으면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21년의 트럭시위에 이어 24년 게임법 위헌 여부에 대한 헌법소원 청구에 게이머 21만명이 몰렸던 것은 한국 유저들의 의식과 행동이 크게 바뀌었음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국산 갓겜 3종
왼쪽부터 네오위즈 'P의 거짓', 시프트업 '스텔라 블레이드', 크래프톤 '인조이' (출처 : 각 게임사 홍보용 이미지)

중견 이하 게임사들을 중심으로 업체들 역시 변하고 있다. 내수(정확히는 내수+중국)에만 안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에 해외 시장과 콘솔 패키지 시장 등에서 돌파구를 찾으려 하고 있고 소기의 성과들을 거두고 있다. 넥슨은 체질 개선을 위해 수년간의 시행 착오 끝에 데이브 더 다이버(데더다)를 시작으로 조금씩 바뀌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물론 메이플처럼 아직 갈 길이 먼 부분도 있지만), 네오위즈는 'P의 거짓', 시프트업은 '스텔라 블레이드', 크래프톤은 최근 출시한 패키지 게임 '인조이'에서 좋은 평가를 얻고 있다.

운영 면에서도 유저를 더 신경쓰기 시작했다. 스마일 게이트의 로스트아크가 금강선 디렉터의 유저 친화적인 소통과 운영으로 이미지를 개선하고 역주행에 성공한 것은 이미 유명한 얘기다. 이를 시작으로 넥슨, 넷마블 등의 대형 게임사들에게도 '유저와의 소통' 이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고, 중소기업 에피드게임즈에 이르러서는 아예 트릭컬 리바이브 1주년 간담회로 예능을 찍어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물론 다른 게임사들이 이렇게 변해가는 와중에도 우리의 엔씨소프트께서는 꿋꿋하게 라이브 방송에서 계속 유저를 농락함으로써 그 클라스 어디 안 간다는 것을 일관되게 보여주시고 계시다.

엔씨가 죽어야 한국 게임산업이 산다.

신뢰를 잃은 기업은 도태되고, 투명한 과금 구조와 게임성으로 승부하는 기업만이 살아남는 시장이 만들어지는 중이다. 시장 상황 또한 더는 유저를 기만하고 돈만 뽑아내는 구조가 통하지 않게 되었다. 유저의 취향은 점점 더 세분화되고, 중국 업체의 약진으로 대표되는 해외 업체들과의 경쟁도 점점 치열해지고 있다. 이쯤 되면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있는 엔씨의 몰락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고, 오히려 한국 게임산업 전반이 해외 시장 수준에 맞춰 나아지고 있음을 방증하는 일이다.

세상에 어느 회사가 고객을 푸대접하는 것도 모자라 노골적으로 적대하는가. 백화점에서 1년에 3억을 쓰면 다이아몬드 플래티넘 어쩌고 하면서 백화점에서 고객 집까지 모시러 간다. 그런데 자사 게임에 6억을 지른 고객을 만나주지도 않고 문 앞에서 쫓아낸다고? 일반적인 회사에서는 상상조차 못 할 일이다.

그 상상도 못 할 일을 해낸 엔씨가 망해간다니, 정말 다행이다. 한국 게임산업의 미래가 밝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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